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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어진내에 두고 온 나' [#85]

교양·라이프시 읽는 토요일 2016년 12월 2일 17:48 윤지은
[한겨레 토요판] 김해자의 어진내에 두고 온 나

어진내에 두고 온 나 / 김해자 
 
지금도 청천동 콘크리트 건물 밖에는 플러그 뽑힌 채 장대비에 젖고 있는 도요타 미파 브라더 싱가 미싱들이 서 있죠 나오다 안 나오다 끝내 끊긴 황달 든 월급봉투들 무짠지와 미역냉국으로 빈 배 채우고 있어요 얼어붙은 시래기 걸려 있는 담 끼고 굽이도는 골목 끝,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소녀가 살고 있네요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
 
배추밭에 배추나비 한가로이 노닐던 가정동 슬라브집 문간방에는 사흘 걸러 쥐어터지던 붉은 해당화가 울고 있어요 지금도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 듣지 않으려 귀 막고 이불 속에 숨어 있다 저도 몰래 뛰쳐나가 패대기쳐진 여인과 아이와 한 덩어리 된 어린 여자 눈물방울이 아직도 흙바닥에 뒹굴고 있을까
 
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키 낮은 집 흙벽 아궁이가 있던 엣 부엌엔 전단지 속 휘갈긴 어린 해고자 메모 '배가 고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애호박 몇 조각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 죽이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효성동 송현동 송림동 바람 몰아치던 주안 언덕배기 그 작고 낮은 닭장집 창문마다 한밤중이면 하나둘 새어 나오는 쓸쓸하고 낮고 따스한 불빛
 
이상하기도 하죠 스무 해 전에 도망쳐 왔는데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있다니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니요

● 제작진
기획: 박유리, 제작: 한겨레TV, 낭송: 김해자, 영상편집: 윤지은, 영상: 이경주
프로그램 공지사항
매주 토요일 한겨레신문 토요판에서 만나는 시인의 시 낭송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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