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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특강] 한규철, 발해의 길(#4-2)

발해-신라, 대결·갈등 속 민족공동체 의식 '싹'
[한민족 시원, 만주] 동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 (2)
초기엔 39개 역참 갖춘 '신라도' 통해 긴밀 교류
동족보다 외세와 손잡은 대가, 남북한 교훈으로

남북국의 교섭은 8세기 초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서고,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 협력을 맺음으로써 다시 대결 구도로 치달았다. 당나라는 819년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 3만 명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이를 수용했다. 당시 3만 명이면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한국사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고 할 만 하다. 이사도는 고구려계인 이정기의 손자로 산둥반도에 진출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은 고구려계로 분류할 수 있는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신라를 끌어들여 남북국 대결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이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되었지만, 남북국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신라는 826년 1만 명을 동원해 발해와 국경에 성을 쌓는 등 발해를 상대로 한 국방력을 강화했다.

거란에 망한 발해, 거란을 도운 신라

발해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발해가 멸망기에 접어든 10세기, 국력이 기운 발해 왕조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거란국지〉는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이 은밀히 '신라(후삼국)의 여러 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해 약속을 받았다고 전한다. 누란의 위기 속에서 발해는 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을까? 두 나라가 비록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삼국시대 이후 이어온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를 돕기로 했던 신라는 약속을 어기고 발해 대신 거란을 도왔고, 그 공으로 선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거란을 돕는 데 군사적 지원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신라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거란을 돕는 꼴이 된다. 발해는 결국 신라의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신라의 방관으로 거란에 망한 셈이다.

남북국시대의 교훈, 근친원교인가, 원교근공인가?

남북국시대 교섭과 대결은 오늘날 어떤 교훈을 주나? 남북 교섭에서 신라의 지배세력들은 국내 정치의 위기를 발해와의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반면 발해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늘 긴장 속에서 신라와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또 남북국은 당과 일본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남북교섭은 차선책이나 보조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남북국시대 200여 년간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가 지속되었고, 정치 군사적 대결이 굳어졌다. 또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온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두 나라의 언어와 풍속이 점점 달라지면서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 후손들은 발해는 물론 거란 속의 발해인과 여진을 다른 종족으로 보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는 오늘날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숨가쁘게 전개되는 국제적인 외교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 나라가 망한 뒤 발해 사람들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
한규철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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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과 한겨레TV가 2010년 공동기획한 청년을 위한 역사강좌입니다.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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